과학, 기술, 의학 분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용어들이 쏟아져나오는가 하면 처음 통용되기 시작할 때 의미 전달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용어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문용어라고 애써 회피해도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지진·기상 재해, 후쿠시마 오염수, 최첨단 기술 등장 등이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용어들은 선뜻 이해하기엔 여전히 어렵고 일부는 잘못 사용되거나, 오해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동아사이언스는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에서 이처럼 전환이 필요한 용어들을 선별해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제안하는 기획을 진행합니다. 전문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대한의사협회, 대한화학회, 한국기상학회, 대한방사선방어학회, 차세대한국과학기술한림원(YKAST)이 이번 기획에 도움을 줬습니다. 제시되는 대체 용어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용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동아사이언스는 국내 기상 전문가들의 도움을 토대로 기상 분야에서 두루 쓰이고 있는 전문용어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거나 잘못 쓰이고 있거나 오인하기 쉬운 단어들을 꼽았다. 기상 분야 용어는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일반 대중이 곧바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거나 정확한 뜻이 전달되지 않는 용어가 적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대체 가능한 용어들을 제안하면서도 학계는 물론 국민들과도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집중호우 →극한호우
전문가들은 '짧은 시간 동안 좁은 지역에서 내리는 많은 양의 비'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단어 '집중호우'가 언론에서 먼저 사용된 후 기상용어화됐다고 설명한다. 때로 '장대비'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정의는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 30mm 이상 혹은 하루에 80mm 이상 비가 내릴 때나 연 강수량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비가 하루 동안 내릴 때를 뜻한다.
기상청에서는 2023년 6월 15일부터 '극한호우'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1시간 누적 강수량이 50mm 이상, 3시간 누적 강수량 90mm 이상인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거나 1시간 누적 강수량이 72mm 이상인 경우를 뜻한다. 특히 극한호우 시에는 행정안전부를 거치지 않고 기상청이 직접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집중호우와 극한호우는 수치상 구분 기준이 다르다. 전문가들은 호우, 집중호우, 폭우 등으로 각각 다르게 사용되는 용어를 정리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강하고 좁은 지역에 많이 내리는 비'를 뜻할 때는 기상청에서 긴급 경보를 발령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도입한 용어 '극한호우'로 통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시간 누적 강수량 60mm를 기록하는 등 극한호우보다 정도는 낮지만 강한 비는 '호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재난에 관련된 용어일수록 유사 용어를 줄여 혼선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러 용어가 난립할 경우 의미 전달에 혼선을 빚어 신속하고 정확한 재난방송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기상청에서는 폭우와 호우의 개념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정리할 것을 제안했다.
해양 폭염/바다 폭염→해양열파
흔히 해양 폭염, 바다 폭염 등으로 불리는 현상은 해양에서 특별히 높은 수준의 수온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해양 열파(marine heatwave)'로 바꿔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양 열파는 기상학계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현상이지만 여러 연구자에 의해 그 정의와 발생 기준이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기준은 '특정 해역의 장기간 평균 수온값보다 임계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경우'다. 이 상태가 최소 연속 5일 이상 지속돼야 해양 열파 현상이 나타났다고 판단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해양 열파의 빈도와 강도가 늘면서 해양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어류 자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국의 경우 특히 해양 열파에 대한 특별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대기천→대기의 강
대기천은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가늘고 긴 띠 모양으로 움직이면서 호우를 일으키는 현상이다. 주로 중위도 저기압의 열대 지방에서 고위도 지역으로 수증기가 이동하면서 좁은 지역에 집중적인 강우를 발생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유럽, 동아시아 등지에서 극한폭우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한 대기천은 영어로 나타내면 'Atmospheric River'다. 이를 한자로 나타낸 것이 대기천(川), 한글로 풀어쓰면 '대기의 강'이 된다. 전문가들은 한자어를 합성한 대기천 대신 '천'의 우리말인 강으로 바꿔 대기의 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언했다.
BAU시나리오→ 고탄소, 중탄소, 저탄소 시나리오
BAU란 흔히 있는 일을 일컫는 관용표현인데, 기후변화 현상과 관련하여 사용될 경우에는 감축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온실가스 배출전망치를 의미한다. 즉, 2020년의 BAU란 인위적인 감축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을 경우 현재의 추세로 볼 때 2020년에 배출될 온실가스의 추정치를 의미한다. 추정시에는 경제성장률, 국제유가변동, 인구변동, 에너지효율 개선추이 등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고려된다. 국제사회는 2050년까지 대기 중 CO2 농도를 450ppm 이하로 유지한다는 글로벌 장기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별로 2020년 중기 감축목표를 설정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때 감축목표는 주로 BAU 대비, 혹은 1990~2005년 대비 절대량을 기준으로 제시된다. 2009년 11월 우리나라 정부는 2020년까지 BAU 대비 30% 감축안을 발표하였으며, 앞으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BAU 대비 방식으로 통일하기로 하였다. BAU는 또한 기준시나리오 혹은 표준시나리오라고 불리며,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각종 정책 및 조치의 효과와 비용 등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
'BAU 시나리오'는 '현행 그대로'라는 뜻의 영단어 'Business as Usual'의 축약형이다. 현행 그대로 온실가스가 계속될 때 향후 지구에 발생할 상황을 분석한 시나리오다. '온실가스 배출 전망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 여러나라 정부 기관·기업 등은 BAU 시나리오를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기준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BAU 시나리오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발표하는 평가보고서는 온실가스를 대폭 줄여 탄소중립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저탄소 시나리오(SSP126)', 현재와 비슷한 수준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고탄소 시나리오(SSP585)'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현재로서는 BAU 시나리오의 수치를 고탄소 시나리오로 보는지, 중탄소 시나리오로 보는지도 합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BAU 시나리오라는 용어로 통일하는 것보단 저탄소, 중탄소, 고탄소 시나리오 등 보다 구체적인 세 분류로 나누어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폴라볼텍스→극소용돌이
'폴라볼텍스(Polar Vortex)'는 주로 겨울철에 북극 상공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저기압이다. 기상학에서는 통상 저기압과 소용돌이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므로 이를 한글로 바꿔 표현하면 '극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극소용돌이는 차가운 지표 온도에 따라 중·하층 대기가 수축하면서 발생하기 때문에 양극(남극, 북극)에서 모두 발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발생 위치에 따라 남극소용돌이, 북극소용돌이로 구별해 지칭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극소용돌이의 강도와 위치 변화는 한반도를 비롯한 중위도 지역의 날씨 패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북극의 온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그 영향력은 좀 더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강한 극소용돌이는 차가운 공기를 극지방에 갇혀있게 하지만, 극소용돌이가 약해지거나 위치가 변할 경우엔 차가운 공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려올 수 있다. 이 경우 중위도 지역은 이례적인 한파를 맞게 된다.
전문가들은 북미지역에서 사용되는 영단어를 그대로 읽은 '폴라볼텍스', '폴라보텍스' 등의 용어를 쓰기보다는 단어만으로 의미를 유추할 수 있게끔 '극소용돌이'로 순화해 쓸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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