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위협하는 재난 된 '폭염' 인명피해 크지만 위험의식은 낮아
스페인·그리스 폭염에 이름 붙여…LA 등 미국서도 논의 "경각심 제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폭염도 재난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제개발구호단체 더프라미스(Thepromise)의 김동훈 상임이사는 지난 4일 SBS 라디오에서 "해외에서는 폭염도 재난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태풍처럼 이름을 붙인다"라고 말했다.
태풍에 '매미' '힌남노'와 같은 이름을 붙이듯 외국에서는 폭염에도 명칭을 부여한다는 것인데 사실일까?
폭염은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일정 기준을 넘는 기온이 지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33도 이상의 최고기온이 2일 이상 지속될 때 이를 폭염으로 간주해 특보를 발령하다가 2020년부터는 기온 외에 습도 등을 고려한 '체감온도'를 특보 발령 기준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최고 체감온도 33도를 웃도는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 폭염주의보, 그보다 높은 35도 이상의 상태에서는 폭염경보가 발령된다.
폭염은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를 불러왔다. 한국방재학회의 논문 '기후변화에 의한 폭염 증가와 대책'(2012)에 따르면 1980년 미국 중남부에서 발생한 폭염으로 1천700여명이 사망했으며 1987년 그리스에서는 최고기온 45도의 폭염으로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95년에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폭염으로 700명 이상이 사망해 '살인 폭염'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폭염으로 인해 3만5천여명이 사망하고 130억 달러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자 국가 차원에서 폭염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후 세계 각국은 폭염경보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본격적으로 폭염에 대응할 정책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5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소방방재청에서 처음으로 폭염종합대책을 수립했다. 2008년에는 기상청에서 폭염특보제를 시행했고 2011년부터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에서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질병관리청은 여름철마다 전국의 응급실로부터 신고받은 온열질환자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를 실시간으로 발표하고 있다.
온난화 현상이 심화하고 지구의 평균기온이 지속해 오르면서 폭염이 발생하는 빈도는 잦아지고 그 정도는 심해졌다. 기상청이 발표한 '2019년 이상 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낮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인 폭염일수는 2000년대 평균 10일에서 2010년대에 15.5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 역시 201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18년은 전 세계적으로 이상 고온이 지속되면서 우리나라에도 '기상 관측 이래 최악의 폭염'으로 불릴 만큼 심각한 폭염이 이어졌다. 당시 전국 폭염일수는 31.4일(평년 9.8일), 열대야 일수는 17.7일(평년 5.1일)로 4천5백명이 넘는 온열질환자와 4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는 응급실에 신고된 수치로, 폭염 때문에 기저질환이 악화하여 사망하는 등의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인명피해는 더욱 클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대학교 환경의학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폭염으로 인한 직·간접적 건강 영향을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초과 사망자 수'는 2018년에만 790여명에 이른다. 폭염으로 인한 재해가 두드러지자 그해 8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상 자연재난에 폭염이 포함되기도 했다.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폭염에 명칭을 부여하는 정책은 스페인의 남부 도시 세비야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더운 곳으로 꼽히는 세비야는 폭염으로 인한 재해가 잦아지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에 따라 폭염을 1~3등급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지난해 처음 시도했다. 가장 심각한 3단계가 예상되는 경우 스페인 철자 체계의 역순으로 폭염에 이름을 붙여 주민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대응 조치를 실시하는 방식이다.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환경 단체 '아드리에네 아르스트-록펠러제단 회복 센터'는 세비야가 지난해 7월 폭염에 조에(Zoe)라는 명칭을 붙인 이후 올 6월과 7월의 폭염에도 각각 야고(yago)와 제니아(Xenia)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스페인에 이어 그리스에서도 올 7월에 발생한 폭염에 클레온(Cleon)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논의 중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지난해 보도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해 폭염 문제가 두드러진 미국 서부 도시 등에서 더위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으로 폭염에 등급을 나누고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세계기상기구(WMO)는 올 7월 성명서를 통해 "폭염에 대한 국제적 표준 분류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단일 폭염에 이름을 지정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혼란을 만들 수도 있다"라며 우려의 입장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폭염에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얼까?
그 이유는 폭염이 그 치명성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재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홍수나 태풍과 달리 폭염은 피해가 가시화되기 어렵고 취약계층에 주로 발생해 '소리 없는 살인자'로 불린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의 2015년 보고서 등에 따르면 폭염 피해는 다른 기상현상과 달리 피해 상황의 확인이 어렵고 동시다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의료접근성이 낮은 농촌 지역 거주자나 쪽방촌처럼 고립된 공간에 거주하는 노인·저소득층, 업무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운 야외 임시직 노동자 등 취약계층이 주요 피해 대상이 된다.
1995년 시카고 폭염 당시에도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단 일주일 만에 발생했다. 통풍이 되지 않는 실내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65세 이상 노인, 저소득층,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 나이·계급·인종 측면에서 취약계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폭염으로 사망한 48명 중 31%(15명)는 집 안이나 집 근처 공간에서 사망했으며, 78%(28명)는 75세 이상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폭염에 취약한 경우에도 위험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폭염 민감계층의 건강피해 최소화 방안'(2020)에 따르면 노인과 저소득층 등 폭염에 민감한 집단도 폭염이 자신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폭염 현상과 그에 따른 증상, 무더위쉼터의 존재나 온열질환 발생 시 행동 요령과 같은 구체적 대응 방안에 대한 인식 또한 부족했다.
폭염에 이름을 붙여온 환경 단체 등은 이름과 등급을 통해 폭염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태풍과 허리케인의 경우에도 관심과 경각심을 키우기 위해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폭염에도 이름과 등급을 붙이면 '내일은 많이 덥다' 정도가 아니라 '내일은 3급 폭염이 시작된다'처럼 그 위험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책임자 커트 쉬크먼은 "스페인 세비야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폭염에 이름을 붙이자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고 기억했으며 이웃과 친척 등에 전화를 거는 등 구체적인 대응 조치를 취했다"라고 밝혔다.
김동훈 더프라미스 상임이사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전례 없는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촉구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폭염에 이름 붙이기도 그러한 시도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작업의 핵심은 국가 차원에서 폭염을 재난으로 인식시키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woo102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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